HALEU 시장의 탄생 — 세계 최초 상업 계약이 열어준 선진원자로 연료의 문

2026. 5. 24. 02:14원자력 뉴스

소형모듈원자로(SMR)나 마이크로원자로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기존 대형 원전보다 훨씬 작고, 공장에서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차세대 원자로입니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오지·군사기지·우주기지 등 전력망이 닿지 않는 곳에도 깨끗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진원자로들이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는 연료가 있습니다. 바로 HALEU입니다. 그리고 2026년 5월, 이 연료에 처음으로 상업 시장이 열렸습니다.

HALEU란 무엇인가

HALEU는 High-Assay Low-Enriched Uranium의 약자입니다. 한국어로는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이라고 합니다.

우라늄 농축도를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자연 상태 우라늄에는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235가 약 0.7%만 들어있습니다. 이걸 높이는 과정이 '농축'입니다. 일반 상업용 원전 연료는 3~5% 수준으로 농축된 저농축 우라늄(LEU)을 씁니다. 핵무기는 9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이 필요합니다. HALEU는 그 중간, 5~20% 농축 우라늄입니다. 핵무기로는 쓸 수 없지만, 선진원자로에는 매우 적합한 수준입니다.

왜 선진원자로는 HALEU가 필요할까요? 소형·마이크로 원자로는 크기가 작아 연료 교체 없이 오랫동안 운전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농축도가 높은 HALEU를 쓰면 적은 양으로도 오래 핵분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일반 배터리보다 용량이 큰 고성능 배터리가 필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세계 최초 장기 상업 계약

5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의 마이크로원자로 개발사 Antares가 유럽의 우라늄 농축 전문기업 Urenco와 장기 HALEU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Urenco 선진연료 사업 책임자 Magnus Mori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번 계약은 세계 최초 다년간 HALEU 공급 계약으로, 이 새로운 시장의 성숙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

 

왜 이것이 이정표인가요? 지금까지 HALEU는 사실상 정부만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에너지부(DOE)가 선진원자로 개발사들에게 정부 보유 물량을 조건부로 공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민간 기업 간에 장기 상업 계약으로 HALEU를 사고 판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Antares가 이 계약을 체결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Antares는 2026년 임계(원자로 자립 핵분열 시작) 달성, 2027년 첫 발전로 시험, 2028년 초도 상업 배치라는 빠른 로드맵을 갖고 있습니다. DOE 정부 물량만으로는 이 속도의 사업 확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Antares CEO Jordan Bramble은 "정부 배정 물량을 초과하는 규모로 확장할 때 상업 공급이 준비돼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공급망 조각들이 맞춰지다

HALEU 계약만이 아닙니다. Antares의 초도 원자로에 들어갈 핵연료 제조는 이미 BWX Technologies가 2025년 10월부터 시작했습니다. BWX가 만드는 것은 TRISO(Tristructural Isotropic) 연료입니다. TRISO는 핵연료 입자 하나하나를 여러 겹의 세라믹 층으로 감싼 구조로, 1600도 이상의 고온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나오지 않는 매우 안전한 연료 형태입니다.

이로써 Antares의 연료 공급망이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Urenco가 HALEU를 농축하고, BWX Technologies가 그것으로 TRISO 연료를 제조하고, Antares의 마이크로원자로에 장전됩니다.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Urenco는 이 HALEU를 어디서 만들까요? 영국 Capenhurst에 HALEU 농축 시설을 건설 중입니다. 영국 정부가 2024년 1억 9600만 파운드(약 3400억 원)의 지원을 결정한 이 시설은 2031년 완공 예정입니다.

'시범'에서 '시장'으로

이번 계약의 의미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HALEU는 이제 정부가 배분하는 자원이 아니라, 민간이 사고 파는 시장이 됐습니다.

선진원자로 기술 개발에서 가장 오래 지적되어 온 걸림돌 중 하나가 바로 HALEU 공급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원자로를 만들고 싶어도, 연료를 안정적으로 구할 수 없다면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번 Antares-Urenco 계약은 그 불확실성을 한 꺼풀 벗겨낸 사건입니다.

Antares는 이 계약 체결과 별개로, DOE 원자로 파일럿 프로그램(Reactor Pilot Program) 최종 단계로 7월 4일 이전 임계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기념일 전에 원자로를 처음 가동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셈입니다. 이 시도의 성공 여부는 선진원자로 상용화 경쟁에서 중요한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선진원자로가 언제쯤 우리 일상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하지만 연료 시장이 열렸다는 것, 이것이 그 여정에서 결코 작지 않은 한 걸음임은 분명합니다.